
소개
2023년 디즈니+를 통해 공개된 영화 <보스턴 교살자(Boston Strangler)>는 1960년대 미국 보스턴 일대를 공포에 떨게 만든 13건의 여성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범죄 실화 스릴러입니다. 맷 러스킨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당시 사회적 편견에 맞서 연쇄 살인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폭로했던 두 여성 저널리스트 로레타 매클로플린(키이라 나이틀리 분)과 진 콜(캐리 쿤 분)의 시선으로 극이 전개됩니다.
이 사건은 한국의 <살인의 추억>을 연출한 봉준호 감독에게도 큰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독 범행 여부에 대해 명확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미제 사건을 바탕으로, 영화는 단순한 범인 찾기를 넘어 1960년대 언론과 경찰의 무능, 그리고 여성들이 마주해야 했던 시대적 억압을 날카롭게 고발합니다.
줄거리: 단독범의 신화와 가려진 진실
1962년, 신문사 '레코드 아메리칸'의 생활부 기자 로레타는 가전제품 리뷰나 맡아야 했던 성차별적 환경 속에서도 범죄 기사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짧은 기간 내에 노인 여성 3명이 동일한 수법으로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사건 현장 관리인과 부검 보고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연쇄 살인의 연관성을 최초로 보도합니다.
보스턴 사회는 발칵 뒤집히고, 신문사는 베테랑 기자인 진 콜을 로레타와 한 팀으로 묶어 본격적인 취재를 지시합니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될수록 사건은 미궁에 빠집니다. 초기에는 노인 여성만을 노리던 범죄가 점차 젊은 임산부와 일반 여성으로 대상이 확장되고, 범행의 수법과 동기 역시 제각각으로 분산되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보스턴 경찰은 타 지역 경찰서와의 정보 공유를 거부하며 수사의 결정적인 단서들을 놓치는 무능함을 드러냅니다.
여론의 압박이 극에 달하자, 수사 당국은 자백을 자처하고 나선 앨버트 데살보를 범인으로 지목하며 서둘러 사건을 종결짓습니다. 하지만 로레타는 데살보의 자백 테이프에서 치명적인 모순들을 발견합니다. 데살보는 교도소 동료들과 함께 포상금과 유명세를 노리고 자백을 사전에 연습한 조작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영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스턴 교살자가 단 한 명의 괴물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원조 살인마의 그늘에 숨어, 임신한 비서를 제거하려던 불륜 상대나 스토킹하던 전 여자친구를 해치려던 남성들이 '교살자의 수법'을 모방해 각자의 범죄를 은폐했다는 것입니다. 즉, 영화가 그리는 '보스턴 교살자'는 단독범이 아니라 사회의 악의가 빚어낸 복수의 가해자들이었습니다. 다만 이 다중 범인설은 영화가 극적으로 재구성한 결론이며, 실제로 사건을 취재했던 로레타 매클로플린 기자 본인은 생전에 데살보 단독범행설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의 진실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합의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극 중 인물 조지 나사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범인이 앨버트라고 믿고 싶었고, 믿어야만 했어요. 다른 결론은 감당하기 어려우니까요."
실화 사건과 실존 인물들의 근황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과 인물들의 후일담은 다음과 같습니다.
로레타 매클로플린: 이후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로 이직하여 저명한 의학 전문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 에이즈(AIDS) 위기를 가장 앞장서서 공론화한 선구적인 저널리스트로 평가받았습니다.
진 콜: 30년 넘게 탐사 보도 전문 기자로 활약하며 언론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습니다.
앨버트 데살보: 1973년 교도소 수감 중 동료 수감자에게 살해당했습니다. 2013년 발전된 DNA 분석 기술을 통해 13번째 피해자의 사건에서만 그의 일치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나머지 12건의 살인 사건은 여전히 법적인 단독 범행으로 증명되지 못한 채 미제로 남아 있습니다.
감상후기: 편리한 괴담 뒤에 숨겨진 구조적 공포
<보스턴 교살자>는 자극적인 살인 묘사에 치중하는 전형적인 범죄 영화들과 결을 달리합니다. 이 영화가 고발하는 가장 끔찍한 공포는 한 명의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한 명의 범인만 잡히면 모든 것이 안전해진다'는 대중과 공권력의 안일한 믿음입니다.
사건 당시 수사 당국과 대중은 데살보라는 가시적인 범인을 처벌함으로써 집단적인 불안감을 서둘러 봉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편리한 안도감 이면에는 여성들을 향한 일상적 폭력과 무수한 모방 범죄들이 철저히 은폐되었다는 것이 영화의 시선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죽이는 것은 앨버트가 시작한 것이 아니며, 앨버트와 함께 끝나지도 않는다."
극 중 등장하는 이 서늘한 대사처럼, 영화는 60년 전의 사건을 통해 묻습니다. 우리가 진실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고 손쉬운 정답에 만족할 때, 사회의 그늘 속에서는 또 다른 모방과 폭력이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묵직하게 경고합니다.